1. 성경적 배경(성가대 역사)
성가대란 예배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조직된 노래(연주)하는 집단이다. 구약시대의 성별된 성가대는 음악적으로나 영적으로 첨병(尖兵)에 해당하는 존재임에 틀림없었다. 구약성경에는 성가대의 기원에 대하여 여러 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다음의 성경구절들은 성가대원의 임명, 구성, 자격, 임무, 그리고 필요성 등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
역대상(6:31-48)에는 다윗이 레위인들을 세워 성전에서 찬양하는 자들로 임명한 것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그 당시 성전예배에서 찬양의 직무를 행한 인물은 헤만(33절), 아삽(39절), 그리고 에단(44절)이었다.
"언약궤가 평안한 곳을 얻은 후에 다윗이 이 아래의 무리를 세워 여호와의 집에서 찬송하는 일을 맡게 하매 솔로몬이 예루살렘에서 여호와의 전을 세울 때까지 저희가 회막 앞에서 찬송하는 일을 행하되 그 반열대로 직무를 행하였더라."(대상 6:31-32)
역대상(16:4-7)에는 다윗과 백성들이 언약궤를 성막에 안치한 후에 레위 사람을 세워 여호와께 감사찬송을 드린 것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또 레위 사람을 세워 여호와의 궤 앞에서 섬기며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칭송하며 감사하며 찬양하게 하였으니 그 두목은 아삽이요 다음은 스가랴와 여이엘과 스미라못과 여히엘과 맛디디아와 엘리압과 브나야와 오벧에돔과 여이엘이라 비파와 수금을 타고 아삽은 제금을 힘있게 치고 제사장 브나야와 야하시엘은 항상 하나님의 언약궤 앞에서 나팔을 부니라 그날에 다윗이 아삽과 그 형제를 세워 위선 여호와께 감사하게 하여 이르기를."
역대상(23:3-6)에는 레위 자손의 구분과 임무에 대하여 언급하며, 사천명의 성가대원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레위 사람은 삼십 세 이상으로 계수하였으니 모든 남자의 명수가 삼만 팔천인데 그 중에 이만 사천은 여호와의 전 사무를 보살피는 자요 육천은 유사와 재판관이요 사천은 문지기요 사천은 다윗의 찬송하기 위하여 지은 악기로 여호와를 찬송하는 자라 다윗이 레위의 아들 게르손과 그핫과 므라리의 각 족속을 따라 그 반열을 나누었더라."
역대상(25:1-7)에는 성전의 기능을 원활히 하기 위하여 조직되어 있던 성가대를 보다 체계적인 24반열로 조직한 것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다윗이 군대장관들로 더불어 아삽과 헤만과 여두둔의 자손 중에서 구별하여 섬기게 하되 수금과 비파와 제금을 잡아 신령한 노래를 하게 하였으니 그 직무대로 일하는 자의 수효가 이러하니라 아삽의 아들 중 삭굴과 요셉과 느다냐와 아사렐라니 이 아삽의 아들들이 아삽의 수하에 속하여 왕의 명령을 좇아 신령한 노래를 하며 여두둔에게 이르러는 그 아들 그달리야와 스리와 여사야와 하사뱌와 맛디디야 여섯 사람이니 그 아비 여두둔의 수하에 속하여 수금을 잡아 신령한 노래를 하며 여호와께 감사하며 찬양하며 헤만에게 이르러는 그 아들 북기야와 맛다냐와 웃시엘과 스브엘과 여리못과 하나냐와 하나니와 엘리아다와 깃달디와 로암디에셀과 요스브가사와 말로디와 호딜과 마하시옷이라 이는 다 헤만의 아들들이니 나팔을 부는 자며 헤만은 하나남의 말씀을 받드는 왕의 선견자라 하나님이 헤만에게 열네 아들과 세 딸을 주셨더라 이들이다 그 아비의 수하에 속하여 제금과 비파와 수금을 잡아 여호와 하나님의 전에서 노래하여 섬겼으며 아삽과 여두둔과 헤만은 왕의 수하에 속하였으니 저희와 모든 형제 곡 여호와 찬송하기를 배워 익숙한 자의 수효가 이백팔십팔 인이라."
역대하(5:12-14)에는 솔로몬이 성전을 봉헌할 때 성가대와 악기를 연주하는 제사장 일백이십 인이 여호와께 찬양과 감사를 드린 것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노래하는 레위 사람 아삽과 헤만과 여두둔과 그 아들들과 형제들이 다 세마포를 입고 단 동편에 서서 제금과 비파와 수금을 잡고 또 나팔부는 제사장 일백이십 인이 함께 서 있다가 나팔 부는 자와 노래하는 자가 일제히 소리를 발하여 여호와를 찬송하며 감사하는데 나팔 불고 제금 치고 모든 악기를 울리며 소리를 높여 여호와를 찬송하여 가로되 선하시도다 그 자비하심이 영원히 있도다 하매 그때에 여호와의 전에 구름이 가득한지라 제사장이 그 구름으로 인하여 능히 서서 섬기지 못하였으니 이는 여호와의 영광이 하나님의 전에 가득함이었더라."
역대하(29:25-30)에는 히스기야 왕이 성전을 청결케 한 후 성전에서 시행되던 각종 제사를 재개하는 것을 다음과 같이 보여주고 있다.
"왕이 레위 사람을 여호와의 전에 두어서 다윗과 왕이 선견자 갓과 선지자 나단의 명한 대로 제금과 비파와 수금을 잡게 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그 선지자들로 이렇게 명하셨음이라 레위 사람은 다윗의 악기를 잡고 제사장은 나팔을 잡고 서매 히스기야가 명하여 번제를 단에 드릴 새 번제 드리기를 시작하는 동시에 여호와의 시로 노래하고 나팔을 불며 이스라엘 왕 다윗의 악기를 울리고 온 회중이 경배하며 노래하는 자들은 노래하고 나팔 부는 자들은 나팔을 불어 번제를 마치기까지 이르니라 제사 드리기를 마치매 왕과 그 함께 있는 자가 다 엎드려 경배하니라 히스기야 왕이 귀인들로 더불어 레위 사람을 명하여 다윗과 선견자 아삽의 시로 여호와를 찬송하게 하매 저희가 즐거움으로 찬송하고 몸을 굽혀 경배하니라."
느헤미야(12:40-43)에서는 재건한 예루살렘 성곽을 봉헌하는 예배의 광경을 묘사하고 있는데, 두 성가대가 교송하는 장면이 다음과 같이 나타난다.
"이에 감사 찬송하는 두 떼와 나와 민장의 절반은 하나님의 전에 섰고 제사장 엘리아김과 마아세야와 미냐민과 미가야와 엘료에내와 스가랴와 하나냐는 다 나팔을 잡았고 또 마아세야와 스마야와 엘르아살과 웃시와 여호하난과 말기야와 엘람과 에셀이 함께 있으면 노래하는 자는 크게 찬송하였는데 그 감독은 예스라히야라 이날에 무리가 크게 제사를 드리고 심히 즐거워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크게 즐거워하게 하셨음이라 부녀와 어린 아이도 즐거워하였으므로 예루살렘의 즐거워하는 소리가 멀리 들렸느니라."
신약성경에는 성가대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없이 찬양의 종류와 방법등에 관한 지적이 여러 차례 나타나고 있다.
신약시대에서 보여주는 성가대의 찬양은 구약시대에 있었던 제사장적 역할이 아니라, 회중 속에서 성가대의 역할이 강조되었음을 알 수 있다.
2. 역사적 배경
성가대 발달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것은 중세시대부터 서서히 자리잡기 시작한 예전의 영향이 컸다. 서방 교회 예배역사의 두 번째 시기라고 할 수 있는 주후 500-900년은 로마 예배의식(the Roman Rite)과 갈리칸 예배의식(the Gallican Rite)이 발달한 시기이다. 예전이 발달함에 따라서 자연적으로 교회에서 노래하는 집단 즉, 성가대의 출현과 발달을 가져오게 되었다.
중세시대의 성가대는 남성으로만 구성되었으며 높은 음역의 노래를 위하여 소년들도 성가대에 참여하게 되었다.
예배의식을 통일하는 데 크게 공헌을 한 사람은 그레고리 교황(Gregory the Great 540-604)이다. 그레고리 교황은 "스콜라 칸토룸"(Schola Cantorum성가대, 후에는 성경학교의 뜻)의 교육을 강화하여 그곳에서 통일된 의식을 가르쳤다. 그는 라테라노와 성 베드로 교황 성당 옆에 성직자들의 공동생활을 위한 숙소와 성가대원 양성을 위한 고아원도 지었다. "스콜라 칸토룸"은 그레고리 교황이 설립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가 교황으로 선출된 590년에는 이미 가수들의 조합이 결성 되었던 시기였다.
여러 가지 상황으로 볼 때 중세시대는 특별히 교육받은 성가대 집단의 발생과 구약시대의 제사 개념에 의한 사제들의 음악목회를 특징으로 한다.
사실상 중세시대의 성가대 제도는 18세기까지 큰 변화없이 계속되었다. 현대 성가대의 형태라고 할 수 있는 혼성 성가대는 18세기에 유럽에서 시작되었다.
예를 들어 영국에서는 "West Gallery Tradition"이라는 것이 18세기 초에 시작되었다. 이 전통의 중요한 의미는 첫째, 여성이 성가대에 참여하기 시작하였다는 것과 둘째, 성가대는 직업적인 것이 아니라 자원하는 사람들로 구성되었다는 점이다.
성가대는 미국에서 청교도들이 몰고온 "역사적으로 균형 잡히지 않은 음악 문화에 대한 염증" 때문에 시련을 받았지만 그 후 현저한 발달을 가져왔다.
뉴욕에 있는 삼위일체 영국 교회는 1693년 성가대원과 오르간 반주자를 영국에서 초청하여 미국에서는 처음으로 성가대를 조직하였다. 1774년 메사추세스 주의 스타우톤에서 빌링스(William Billings, 1746-1800)에 의하여 최초로 성가학교(Sacred Singing School)가 설립되었다. 그때 창단된 성가대는 남성 17명과 여성 31명으로 구성된 혼성 성가대였다.
19세기에는 메이슨(Lowell Mason, 1792-1872)에 의하여 가창(singing)이 공립학교의 교과목으로 소개되었고, 보스톤 음악협회(the Boston Academy of Music)가 창립되어 성가를 중심으로 한 활발한 음악 활동이 이루어졌다.
메이슨의 제자인 브래드버리(William Bradbury, 1816-1868)는 뉴욕의 침례교도 예배소(the Baptist Tabernacle)에서 오르간 연주자로 봉사하며 성가음악에 공헌했다.
19세기 후반 교회가 성장함에 따라 자연적으로 전문적인 성가대의 가창 인도자가 발생하게 되었다. 이것이 혼성 4중창단(the Mixed Quartet)이다. 이 혼성 중창단은 두 가지 기능을 담당하였는데 첫째, 성가대와 같이 노래함으로써 자원 성가대원들을 노래로써 돕는 것이고 둘째, 성가대를 대신하여 찬양하는 것이었다. 이로 인하여 성가대 음악의 질적 수준이 향상되었으며, 성가대에 독창자를 두게 되는 직접적인 동기가 되었다.
20세기에 들어서면서 성가합창을 강조한 웨스트민스터 성가학교 등으로부터 본격적인 음악목회 사역의 개념들이 생겨나기 시작하였다.
3. 성가대의 역사
(1) 성가대의 기원
① 구약성서에 나타난 성가대 기원
성가대의 기원은 앞 3장 교회음악의 역사에서도 충분히 논술된 것이기 때문에 내용적으로 중복되는 부분이 있다. 그러기에 이 장에서는 교회음악의 역사보다는 성가대의 기원과 역사에 대한 내용을 중심으로 알아보려 한다.
창세기 4장 21절에 '그 아우의 이름은 유발이니 그는 수금과 퉁소를 잡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었으며...'라는 구절은 음악의 조상에 대한 성경의 최초의 문헌이다. 이렇게 시작되는 교회음악의 역사는 구약성서의 여러 구절을 통하여 성가대의 기원과 목적, 그리고 예배에서의 성가대의 역할과 기능에 대하여 상세하게 알려주고 있다.
성경에서 보여주는 찬송의 역사는 교회음악의 역사인 동시에 일반 음악사의 고대 음악을 입증할 수 있는 유일한 문헌적 가치를 지니고 있으며 또한 이것이 성가대 기원의 역사이다.
성가대의 기원은 구약성경 역대상을 통하여 잘 나타나고 있다. 다윗은 그 당시 하나님의 일을 전담하는 자들로 레위 사람을 택하고 그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사역을 담당케 하였다. 이렇게 레위 자손을 택하게 된 이유는 하나님의 구체적인 말씀으로 알 수 있는데 그 말씀은 민수기 3장 11절과 12절에 모세에게 이르시기를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11절)' "보라 내가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레위인을 택하여 이스라엘 자손 중 모든 첫 태에 처음 난 자를 대신케 하였은즉 레위인은 내것이라"고 하셨으며 이들로 찬양하는 일을 전담케 하셨다.
성가대의 기원은 역대상 15장 16절에서 22장에서 '다윗이 레위 사람의 어른들에게 명하여 그 형제 노래하는 자를 세우고...(16절)'라고 하였던 것으로 보아 성가대의 기원의 역사를 말하고 있다. 이 당시에도 노래와 더불어 모든 악기와 함께 연주하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은 앞 구절과 이어 '...비파와 수금과 제금들의 악기를 울려서 즐거운 소리를 크게 내라(16절)'고 하였던 것에서 살펴 볼 수 있다.
또한 그 당시 레위 족속의 수(음악하는 이의 수)가 지금 보아도 그 규모가 얼마나 엄청난지를 알 수 있다. 역대상 23장 5절에 "...사천은 다윗의 찬송하기 위하여 지은 악기로 여호와를 찬송하는 자라"고 했던 구절로 보아 노래하는 성가대의 수가 사천 명이라는 것을 알 수 있으며, 이 구절은 후에 성가대의 인원을 계산하는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다.
이 당시에도 성가에 전념하며 노래만을 가르치던 일에 골몰하는 자를 세웠는데 역대상 15장 22절에 '레위 사람의 족장 그나냐는 노래에 익숙하므로 노래를 주장하여 사람에게 가르치는 자요'라고 되어 있다. 이렇게 다윗 시대에는 찬양의 직분을 주어 성가대를 두었으며 이 직분을 감당한 자들로는 찬양과 놋제금(놋으로 만든 타악기, 심벌즈의 일종)을 치는 자를 헤만{{) 헤만: 신실한 이라는 뜻을 가진 자로 솔로몬과 비교된 이름난 지혜자(왕상 4:31) 시편의 저자(시편 88편)로 또한 하나님을 만드는 선견자요 다윗 왕의 수하에서 찬송의 직무를 행하였다.
헤만(Heman) : 모으는 자의 뜻을 가짐,다윗 왕과 솔로몬 치세시 찬송을 맡은 레위인, 시편 열 두편을 지음, 그 자손들도 찬송하는 자가 되었다.
아삽(Asaph)에게 명하고 그리고 노래를 지도하는 자로는 에단과 그나냐(Chenaniah : 여호와께서 심으셨다.레위인의 족장으로 재판관이며 다윗 왕 때의 노래하는 일에 전념하며 가르치던 자)를 세워 그 재능에 따라 전문적인 활동을 하게 하였으며 이것은 그들의 자손들에게 대물림되었다.
성가대는 이렇듯 구별된 자들로 세워졌으며 그 자격도 제한을 두었다. 역대상 23장 3절에서 '레위 사람은 삼십 세 이상으로 계수하였으니 모든 남자의 명수가...' 라고 한 말씀에서처럼 이 당시 성가대는 남자만으로 구성하였으며 이렇게 선별된 레위인 중에서도 삼십 세 이상만을 인구조사 하여 그 직분을 맡겼다.
구약시대로부터 교회음악은 역대상 9장 33절의 말씀에서 보듯 '또 찬송하는 자가 있으니 곧 레위 족장이라 저희가 골방에 거하여 주야로 자기 직분에 골몰하므로 다른 일을 하지 아니하였더라'라는 말씀처럼 찬양을 위해 전담하여 전심으로 그 직분만을 담당하는 제도가 이때부터 시작되었던 것이다.
솔로몬 시대에 예루살렘 모리아 산에서 여호와의 성전을 건축을 시작하여 7년만에 성전의 건축을 마치고(기원전 967년경) 하나님께 봉헌 의식을 거행하며 세마포를 입고 노래하는 자와 그 밖의 악기를 다루는 자의 수가 120명이 되었다. 이렇게 음악을 담당하는 신분은 하나님이 말씀하신 레위 지파로 택하시고 그들로 하여금 세마포를 입도록 하였으니, 이 제도는 왕이나 대제사장들과 고귀한 신분에 속한 자들만이 입을 수 있었다. 역대상 15장 27절에 '다윗과 궤를 멘 레위 사람과 노래하는 자와 그 두목 그나냐와 모든 노래하는 자도 다 세마포 겉옷을 입었으며...'라고 하였던 것처럼 구별된 직분을 나타내는 세마포를 입어 그 권세와 거룩함을 알리게 하였다.
솔로몬 이후 유다 왕국은 멸망으로 향하고 바벨론의 포로가 된 히브리인들은 언약궤를 손실하고, 성전도 파괴되었으며, 이렇게 포로가 된 70년간은 예배와 찬양조차 당당하게 드릴 수 없는 수난을 겪게 된다.
그후 신약 시대의 그리스도 예수의 탄생과 그의 생애를 전후로 하여 예수님의 공생회 시기의 음악은 구약의 시가서인 시편의 송영이나 영창이 주된 음악이었으며, 그저 읊조리는 형태의 음악을 즐겨하였다. 이런 음악은 주로 무반주로 기악의 반주가 없는 순수한 노래로 제한되었으며, 이런 음악은 회당 음악의 형식으로 가장 적합한 것이었다.
사도시대는 예수님 사망 후 약 1백년 동안을 말하는 시기이다. 예수님 당시의 음악은 구약의 시편을 중심으로 한 음악이며 지금도 신약시대의 음악에 대한 중요성은 그리 고려되지 못하는 이유는 구약의 시편만큼 위대한 시가서를 발견 못한 것에서 기인하기도 한다.
구약성경을 유대인들은 율법 . 선지서 . 성문서로 구분하고 시편 . 욥기 . 잠언 . 전도서 등을 '지혜로운 사람들'이 즐겨했다 하여 <지혜서>로 구분하였다. 그 중에서도 시편은 가장 음악적인 시(詩)로 헬라어인 '프살모이'(Psalmoi)를 음역한 것이며 이는 '수금을 치며 부르는 노래'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이렇게 구약의 시편을 노래하던 것에서 신약시대의 사도들을 중심으로 새로운 노래들이 작곡되기 시작하였다.
또한 이 당시 그리스 문화는 피타고라스·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소크라테스 등 많은 사람들로 인하여 기독교에 좋은 토양을 제공하였다. 이들이 끼친 영역은 철학, 자연과학, 수학, 천문학, 음악 등 무수히 많은 학문들이 쏟아져 지금에 이르기까지 학문적 기반을 이루는 중요한 밑거름이 된 시기이기도 하다. 이 그리스의 근본적 정신과 그 바탕을 이루는 것은 기독교 교회와 유태교에서 유래했지만, 그들의 이룩한 중세의 모든 학문과 음악에 관한 학문적 업적은 매우 놀라운 것으로 앞으로 다가올 그리스도교의 발전에도 큰 발판으로 작용하게 된다.
② 313년 이후의 교회음악에서 종교개혁 전까지의 음악
사도시대 이후, 313년에 이르러 밀라노 칙령에 의하여 그리스도교가 로마의 국교가 된 후 교회는 억압과 핍박에서 벗어나 로마의 보호 속에서 자유로운 활동을 할 수 있었다. 교회의 교세와 재산이 불어나고 교황의 의식과 활동이 활발해지면서 로마에 예루살렘을 회복하는 성가 학교(Schola Cantorun)라는 음악학교가 설립되었고, 소년들과 성인 남자들을 정식 음악교육을 하게 되었다.
또한 529년에 설립된 성 베네딕트 수도원(또는 몬테카시노 수도원)은 서유럽을 중심으로 가장 크게 공헌한 수도원으로 로마 남동쪽에 자리를 잡고 수도원장과 수도승들을 중심으로 활동이 두드러졌으며, 이때 수석 독창자 제도인 칸토르(Cantor)제도가 확립되었고, 이것으로 인하여 전문적인 성가교육 및 교회음악의 발전에 크나큰 기여를 하게 되었다.
서방의 교회음악에 가장 큰 영향을 주었던 교황 그레고리우스 1세는 그레고리안 성가집을 만든 업적과 더불어 예배의식을 재편찬하면서 노래학교의 재조직에도 힘을 썼다. 기원 후 3세기 이후 교회음악은 예배를 중심으로 음악이 주된 역할을 하였으며, 이 당시의 음악은 개인적인 즉흥적인 변주의 형태였다. 예배음악은 응답식이어서 교창이 없이 혼자 노래를 부르거나, 독창자와 합창단의 교창으로 진행이 되거나 하는 답창식으로 두 개의 합창단이 교대로 교창하는 식의 예배를 음악으로 진행했으므로 성가대의 조직과 중요성이 더욱 두드러졌던 것이다.
다성음악의 발달은 교회음악에서 특히 로마의 보수적 대위법의 학습과 훈련을 쌓도록 하였으며 이로 인하여 더욱 견고한 음악작품들이 탄생하였다. 17세기 짤츠부르크의 태생의 교회음악의 대표적 작곡가인 베네볼리(Orazio Benevoli : 1605∼1672)의 작품에서는 합창단이 여러 방향에서 연주하게 하여 마치 모든 방향에서 들려오는 음악으로 환상적인 느낌으로 빠져들게 하였으며, 이 시기가 다성음악의 최고의 극치를 느낄 수 있는 시기였다.
또한 스페인에서도 몬트세라 수도원의 에스코라니아(escolania)라는 합창 학교를 통하여 다성음악(polyphony)의 진수를 맛 볼 수 있었다. 이런 지금까지의 성가대 변천사를 살펴본다면 초기 구약시대의 성가대에서 시작에서 11세기 이전까지, 그저 단순히 한 선율만을 연주하는 단선음악{{) 단선음악(모노포닉, monophony) : 최초 교회음악과 고대 그리스음악에서 중세, 그리고 13세기에 이르는 음악으로 단선율의 음악이다. 그리스어로 monos(단일의)와 phone(음)의 합성어이다.
}}(Monophony)이었으며, 11세기 이후 나타나는 두 성부 이상의 복음을 연주하는 다성음악(Polyphony)으로 발전되면서, 높은 성역인 소프라노(Soprano)를 감당해야 할 필요성이 더욱 강해졌다. 이러한 필요성은 지금까지 변성전의 소년들을 성가대에 기용하여 높은 성역을 담당하게 했던 것이 16세기에 이르러서는 음악이 점점 복잡해지고 어려워지게 되면서 높은 성역을 담당할 다른 대안을 찾게 되었지만, 이때까지도 성가대는 남자만으로 구성되어야 한다는 원칙이 적용되었고, 이런 요구에 의해 17세기경 이태리에서는 소년이 변성되기 전에 거세를 행하여 어른이 되서도 영원히 높은 성역을 담당하게 하는 카스트라토(castrato : 어린 남성의 아이를 변성기 전에 거세하여 어른이 되어도 소프라노나 알토의 성역을 지니게 하여 음악의 높은 성역을 담당하게 하였다. 소리는 소년이나 성인 여성에 비해 강하고 순수하며 또한 성역도 훨씬 넓었다)를 두었는데 카스트라토란 라틴어로 castrare(거세하다)에서 나온 말로 16세기 이후 가톨릭교회음악에서 많이 사용하다가 17∼18세기에는 종교음악만이 아닌 이태리 오페라에서도 많이 노래하게 되었다. 후에 가톨릭에서 이와 같은 비인간적인 행위를 금지시켰으며 새로이 여성이 성가대에 도입되면서 자연스럽게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③ 종교개혁 이후 성가대 발전으로부터 현재까지
종교개혁은 1517년 10월 31일 면죄부(免罪符)에 관하여 95개조의 논제의 항의문을 비덴베르크대학의 성(城)교회 정문에 게시하므로써 시작되었다. 이 사건은 마인츠의 대주교 교회의 알프레히트가 제정적인 타개책으로 면죄부를 판매한 것에 대한 아우구스티누스회의 수도사이면서 신학 교수였던 독일의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가 그 성서적 입장을 신학적으로 문제 삼으면서 시작하였고, 이 불씨는 순식간에 전 유럽으로 확산되게 되었다.
프로테스탄트의 핵심적인 사상은 단순히 가톨릭교회의 타락에서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신학적 의견을 달리하는 것에 있다.
또한 루터는 음악에 있어서도 굉장한 관심을 가진 음악가이기도 하였다. 루터가 추구하는 종교개혁의 정신은 음악에 있어서도 지대한 변화를 가져오게 되었는데, 그 변화를 살펴보면 지금까지 전문적인 찬양을 담당하던 성가대를 일반 평신도를 중심으로 구성하게 하였으며, 성경과 찬송의 가사를 라틴어에서 모국어인 독일어로 바꾸어 사용하게 하였다. 또한 예배 중 회중 찬송이 허락되었으며, 이 회중 찬송인 코랄에 있어서 4성부의 화성진행으로 성가대와 회중이 함께 화음으로 부를 수 있는 여건에도 불과하고 코랄은 유니즌(Unison : 다같이 한 선율로 제창으로 노래하는 방식을 말함)으로 부르게 하여 그 방식이 현재에 이르도록 변하지 않고 있다. 이렇게 유니즌으로 노래하는 방법은 음악적으로 가장 단순하고 소박한 형태이며, 이렇게 부름으로써 단순한 단선율에 의해 하나된 일체감과 노래 가사의 전달이 명확해져서 노래 가사의 내용이 '말씀'이라는 루터의 복음주의(evangelicalism, 福音主義)로 복음주의는 성서를 중심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중시하는 그리스도교를 말하며, 여기에는 여러 가지 다음 입장들이 있다.
① 종교개혁자 M.루터의, 이신득의론(以信得義論)인 “인간은 신앙에 의해서만 의롭다 함을 입는다”는 주장 ② 성서의 연구보다 '전도'가 중요하다는 주장 ③ 무엇보다도 성서가 우선한다는 성서주의의 입장 ④ 성서와 성령에 의한 신앙의 체험이 중요하다는 체험주의의 입장 ⑤ 근대 자유주의신학에 반대하며, 예수의‘하나님 나라(천국)’의 복음보다는 그것과 더불어 바울사도의 속죄(贖罪)와 부활의 신앙을 강조하는 입장 등이 있다.
이것은 예배의 의식을 중요시하기보다는 설교를 중요시하여 교회음악에 있어서도 그 영향을 받아 가사의 사용에 있어서도 언어의 정서적인 표현과 가사를 중요시하는 가사의 절대주의를 실행하게 되는 정신이 잘 반영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당시 종교개혁은 독일의 루터와 스위스에서 츠빙글리(Ulrich Zwingli : 1484∼1531), 그리고 프랑스의 칼빈(Calvin : 1509∼1564)에 의하여 주도되었으며, 이 세 사람 모두 종교개혁에 대한 업적도 크게 인정받고 있지만, 종교 음악에 끼친 영향도 지대하였다. 그러나 세 사람의 음악관은 기본적인 몇 가지의 공통점 외에는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었으며, 특히 예배의 음악을 도입하는 문제에 있어서 서로 다른 상이함을 보이고 있다.
교회음악의 예배 사용에 대한 이들의 공통적인 견해라면 자기 나라의 모국어로 된 성경과 가사를 가지게 했다는 것이며, 찬송의 가사를 시편을 사용하였고, 가사와 선율이 일치가 되도록 운율과 리듬, 그리고 선율이 일치하도록 했다는 것이다.
이런 종교개혁의 영향으로 가톨릭 예배 의식인 '전례'(典禮)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성가대의 구성과 역할이 축소되면서 '말씀'이 중심이 되고 성가대는 예배를 돕는 역할만을 담당하게 되었다. 그것도 전문적 형태의 성가대가 아니라 종교개혁 이전에 성가학교를 통하여 전문적인 예배음악가들이 하던 음악에서 일반 회중으로 구성된 성가대가 만들어지게 되었다.
지금의 성가대처럼 높은 성역인 소프라노와 알토(Soprano & Alto)를 여성이 담당하게 된 것은 그 후 한 세기가 지나 18세기 이후에 와서야 가능하였다. 그 시발점이 된 곳은 여자들만이 생활했던 여자 수도원으로 수도사들이 예배 때 사용하는 성가나 찬양을 예배에 적용하면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다. 진정한 혼성성가대의 초기적 형태는 18세기 독일에서 처음 시작되었으며, 미국에서 제일 처음 설립된 혼성성가대는 1774년 메사추세츠주(州)의 스타우톤(Stoughton) 시(市)의 윌리엄 빌링스(William Billings)에 의하여 설립된 성가학교(Sacred Singing School)였으며 그로부터 얼마 안되어 각 교회들이 혼성성가대 제도를 받아 들였다.
이를 계기로 여성들의 사회 참여가 활발해졌으며 사회적 인식이 전환되는 발판이 되기도 했다.
영국은 종교개혁 이후 일반인들이 노래하는 찬송이 18세기 아이작 와츠(Isaac Watts; 1674∼1748)에 의해 불려지게 되었으며 그 전의 영국의 찬송은 시편가(Psalmody)였다. 아이즈 와츠는 젊은 목사로서 대중 예배에 찬송을 도입을 꽤하였으며 영국의 운동은 복음운동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또한 웨슬레 형제의 교회 부흥 운동은 18세기 영국을 휩쓸면서 감리교회의 창립을 이루게 되었고, 이것은 미국의 부흥집회 운동에 큰 영향을 주었다.
미국은 프로테스탄트(Protestant Church)개혁파들이 종교적 박해를 피해 새로운 땅을 찾아 필그림 파더스(Pilgrim Fathers)가 정착하면서 역사가 시작되었다. 미국의 초기교회음악은 대부분이 유럽 음악이 수입되어 본토 지방의 특색과 혼합되어진 것이어서 매우 혼란스러운 것이었다. 오히려 초기 미국의 종교 음악은 그 근본적인 뿌리를 어디에 두어야 할지를 몰랐기 때문에 영국에서 수입된 음악과 유럽의 각 지방의 음악이 섞여 그 맥락이 없었던 시기였다. 이런 것이 1800년에 들어와서는 점차로 미국의 자생 음악이 형성되었고, 그것과 더불어 유럽과 독일에서 신대륙으로의 이민으로 인하여 미국음악문화의 기초를 세운 시기라 할 수 있다. 1860년 이후 지금까지 미국 내에서 완전한 음악 문화가 실현되어 미국에서 태어난 후손들이 주축이 되는 음악 시기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미국의 수입된 찬송가는 역시 영국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아 본뜬 것으로 초기의 찬송가는 시편 송가만을 찬양했다. 미국의 찬송가의 형태는 멀리 떨어져 있는 영국의 영향을 계속 받았으며, 미국 찬송가의 독자적 특성에 영향을 주었던 것은 오히려 흑인영가(negro spirituals : 黑人靈歌)였다. 흑인영가는 19세기초부터 발생하였으며 처음에는 주로 흑인들을 중심으로 불리어졌으나, 그 범위가 미국 전역과 유럽 각지에까지도 널리 애창되게 되었다. 이 시기에 가장 많은 활동을 한 단체로는 테네시주 네시빌에 있는 흑인대학인 피스크대학의‘피스크 주빌리 싱어즈’로 그들의 활약은 흑인영가라는 한 장르를 정착시켰고 미국 교회음악에 큰 영향을 주었다. 이들의 음악은 아프리카에서 미국으로 이주한 흑인들로부터 나온 음악으로 그들이 가지고 있던 아프리카의 토속적인 음악이 예수 그리스도의 신앙을 접하게 되면서 새롭게 만들어진 음악이다. 그들의 이런 음악에는 아프리카 고향에 두고 온 부모형제의 그리움과 정신적·육체적으로 노예라는 신분에 대한 설움과 고달픔을 실어, 하나님에게 자신들의 애환(哀歡)을 호소하는 듯한 선율에 실어 자유와 해방에 대한 절규에 가까운 음악으로 미국의 교회음악에 접목되게 되었다.
미국에서 최초로 성가대가 조직된 곳은 뉴욕에 있는 삼위 일체 영국교회였으며 초기 미국 내에서는 성가대를 조직할 수 없었기 때문에 영국에서 교회음악가들을 초청하여 1693년에 최초로 성가대를 조직하였다. 이런 성가대의 발전과 더불어 미국은 복음찬송 운동이 대 붐을 일으키게 되었는데, 이 또한 영국의 영향을 받은 대 전도 부흥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다. 이런 심령 대 부흥운동의 영향은 영국의 웨슬레파와 복음주의 부흥운동이 한 세기 전에 영국에서 성황리에 일어났던 것처럼 미국은 심령부흥운동으로 미대륙을 휩쓸기에 충분했다. 이 부흥운동의 부흥사들은 복음 찬송가의 필요성을 깊이 인식하여 찬송가를 이끌어갈 지도자를 두고 집회를 가지게 되었다. 이것이 음악을 통한 복음 사역의 시발점이 되었다.
미국의 부흥운동은 1870년 초 미국 드와이트 무디(Dwight L. Moody : 1837∼1899)가 그 선두주자로 그는 늘 그의 찬양의 동역자인 아이라 샌키(Ira D. Sankey)와 함께 부흥집회를 수없이 같이 다녔다. 그들은 와이 엠 씨 에이(YMCA : 기독교 청년회의 약칭으로 1844년 런던의 히치콕 로저스 상점의 점원이던 J.윌리엄스가 12명의 청년들과 함께 설립하였으며, 그 후 유럽으로 확산되었다가 1955년에 이르러서는 세계 YMCA로 크게 발족하고 활동하고 있다.)라는 기독교 청년연합회를 통하여 만났으며, 무디 목사와 샌키는 이런 복음운동의 동역자로 평생을 같이 활동하였다.
우리 나라 개신교의 역사는 1880년대에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는데 1885년 4월 5일 장로교의 선교사인 언더우드(H. G. Underwood : 1859∼1916)와 감리교 선교사인 아펜젤라(H. D. Appenzeller)가 인천에 들어오면서 소개되었다. 초기의 선교사들은 우리 나라에 들어와 선교와 더불어 찬송가를 정리하여 내놓았고, 이로써 우리 나라의 교회음악의 역사가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우리 나라 교회음악에 있어서 영향을 준 것은 미군이 6.25 사변이후 주둔하면서였다. "미 8군 군인 교회 성가대로 발족한 '필그림 합창단'이 이동훈(李東勳)의 지휘 아래 꾸준히 활약하고 있었고, 황임춘(黃任春) 지휘의 '아넬 성가단', 김두환 지휘의 '아가페 합창단', 박재훈 지휘의 '서울 코랄' 등이 이 나라 교회음악 발전을 위한 일익을 담당하였던 것이다."
이렇게 활동을 시작한 교회 성가대와 합창단은 서울을 중심으로 하여 전국의 여러 교회에서 활성화되며 발전하였고, 이런 동시 다발적인 발전으로 인하여 교회 성가대나 합창단을 이끌어갈 유능한 지휘자와 성가대원의 확보 등이 시급한 과제였다.
교회 성가대의 활동이 가장 활성화되었던 영락 교회나 새문안 교회, 정동 감리교회 등 비교적 큰 규모의 교회들의 성가대가 활동하면서 작은 교회의 성가대도 더불어 활성화되었다.
1954년 12월 15일에는 미국 연합장로회 선교사 오토 E. 디캠프(한국 이름으로 감의도)가 미국의 선교사업기구의 하나인 시청각 위원회(Ravemcco)의 도움을 받아 기독교 방송국(Christian Broadcasting System, 基督敎放送局)을 설립하였다. 기독교 방송은 기독교적 사명과 기독교적 교양의 육성과 복음의 전파를 목적으로 세워졌으며 이것은 한국 최초로 민간방송의 시작이며 종교방송설립으로도 최초의 일이었다. 1954년 기독교 방송국이 설립되면서 한국의 개신교 발전은 더욱 가속화되었고, 특히 한국 교회음악과 성가대의 발전에 크나큰 사명을 감당하였다. 이런 한국 개신교의 전파와 발전으로 지금은 교회마다 성가대가 조직되었으며 큰 규모의 교회는 몇 개의 독자적인 성가대를 가지고 있을 정도로 성가대의 필요성과 구성이 보편화되었다. 그 수준도 크나큰 발전을 이룩하여 지금은 확고한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한국 교회음악의 역사는 찬양과 찬송가 중에 한국 찬송가의 역사를 참고 하기 바랍니다)